2017년 4월 1일, 하남에서 파주까지 60km를 걸어서 19시간 만에 도착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도보로 세계여행을 한 사람들에게는 가소로울 수도 있는 거리지만 굉장히 뿌듯했다. 도보 여행을 하기 전보다 훨씬 성장했음을 느낀다. 나만의 특별한 무기가 생겼다는 기분이랄까?

나는 하남에 산다. 여자친구는 파주에 산다. 문득 누군가를 향해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를 만날 때는 항상 지하철을 타고 만났다. 파주까지 걸어서 얼굴은 본다면 어떤 감정이 생길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이번 도보 여행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겨우 하남에서 파주까지 걸었다고 자랑이야'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를 만나기위해 하남에서 파주까지 걸어서 갔다는 특별한 경험. 나의 특별한 사람을 특별한 방법으로 만난다면 앞으로도 특별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4월 1일 새벽 6시 22분 호기롭게 출발했다. 설레는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처음에 걸을 때는 마냥 좋았다. 걸어서 파주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기하고 특별했다. 가면서 공사 중이라 막힌 길도 만나고 굴다리 밑 길도 지나가고 다리도 건너고 육교도 올라갔다. 아침부터 한강 공원에서 운동 중인 수많은 사람도 만나고 드론 공원에서 날아다니는 드론도 보았다. 도보 코스에는 어린이 대공원도 있었다. 어린이 대공원을 후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왔다. 




하남 집에서 출발했다. 6시 22분이라 아직 하늘이 어둡다




도보 코스에는 어린이 대공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왔다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걷다보니 왕십리역까지 왔다. 카카오 맵을 보면서 걸었고 2호선 길 따라 쭉 가서 중간 목적지인 합정에서 쉴 생각이었다. 잠깐 길이 쉽다고 판단돼서 카카오 맵을 안 보고 걸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지도를 보니 가려던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면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잘못 들어 좋았던 점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무학교라는 다리 위에서 깨끗한 물과 물고기를 봤던 것이다. 투명한 물에서 잠자는 듯 움직이지 않는 물고기를 보면서 '서울 중심에 이처럼 맑은 물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청계천 무학교 다리 밑 물고기. 물이 정말 맑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시청이었다. 경찰들과 탄핵반대 시위를 준비 중인 시위대를 보았다. 덕수궁을 지날 때는 풍악을 울리는 조선 시대 코스프레 공연을 잠시 지켜봤다. '시청이란 공간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시위를 준비하는 박사모들과 비상사태를 대비하려고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경찰들, 그 앞에서 제례 공연을 하는 조선 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볼거리를 제공했다.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종종 뜨였는데 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위대와 경찰, 조선시대 제례 공연의 하모니. 대한민국을 현재를 잘 반영해주는 모습 같다

걸으면서 합정에 점점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홍익대가 보였다. 홍대 예술의 거리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있었다. 예쁘고 멋있게 꾸미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다. 나는 운동복에 등산 가방을 메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갔다. 창피해서 기죽었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었다. 다른 사람이 주말에 친구를 만나고 노는 일반적인 경험을 할 때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홍익대를 지나고 드디어 중간 목적지인 합정에 도착했다. 합정을 중간 목적지로 잡은 이유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 사무실이 있기 때문이다. 합정까지 오는데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었다. 6시 22분에 출발해서 12시 56분에 도착했으니 6시간 34분을 내리 걸은 것이다. 갈증이 나 근처 편의점에서 초콜릿 우유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마신 뒤 바로 옆 오리 고깃집에 가서 오리 훈제 정식을 흡입했다. 밥맛이 참 좋았다. 다 먹고 시간을 보니 오후 1시 40분. 땀으로 젖은 양말을 갈아 신고 좀 쉬어야겠다고 느꼈다. 회사 사무실로 가서 그대로 테이블 위에 누웠다.




합정에 드디어 도착했다. 6시간 34분 만에 도착한 합정

1시간 정도의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양발에 물집도 몇 개 잡혀서 그런지 따끔거리기도 했다. 지체하면 여자친구보다 늦게 도착할 것 같아 오후 3시 21분에 합정에서 다시 출발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날씨가 괜찮았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가는 방향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는 먹구름이 없고 밝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비가 오기 전에 어서 파주 쪽으로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발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합정 위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저멀리 파주가 있는 북쪽은 맑은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많이 오진 않아서 맞고 걸을만했다.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파주 쪽으로 걸어서인지 비는 점점 줄어들었다. 비는 결국 그쳤는데 다리가 점점 아파왔다.

저 멀리 고양시를 가리키는 팻말이 보였다. 파주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데 다리가 너무 아팠다. 근처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다리를 쭉 펴 양손으로 쓸어내리고 발바닥을 지압했다. 10분에서 20분 정도 쉬고 다시 일어났다. 쉬었다 걸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리가 저려왔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대곡역을 향해서 걸어갔다. 수색, 화전, 강매, 행신, 능곡역을 지나야 했다. 지하철 경의중앙선인데 오전에 걸었던 2호선에 비해서 각 역의 거리가 꽤 멀었다. 지친 탓일까? 2호선은 조금 걸으면 바로바로 다음 역이 나왔는데 경의중앙선은 너무나 더뎠다. 힘이 점점 빠져갔다. 가다가 벤치에서 양말을 벗었다. 물집이 더 잡혀있고 오른쪽 발등이 부어있었다. 발을 쭉 뻗기도 하고 발목을 돌려보기도 했다. 고통이 밀려 왔다.

내가 신은 운동화는 오래된 러닝화였다. 깔창도 없었다. 신은 양말과 가져온 양말도 얇디얇았다.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남에서 파주까지 카카오 맵으로 걸어서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을 때도 잘못 판단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지치고 속도는 느려지고 도착시각도 늦어진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하고자 하는 열망만 있었을 뿐 고민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가야 했다.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는 웨딩사진작가다. 평일에 날을 골라서 쉬어야 한다. 파주에 살지만 근무지가 강남구청역 근처라 아침 일찍 나가서 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한다.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라 활동량이 어마어마하다. 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지하철이 붐비면 서서 출퇴근을 한다. 일이면 일, 이동이면 이동, 뭐하나 편하지 않다. 그런 여자친구가 일 끝나고 파주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고 싶었다. 그래서 힘내서 다시 걸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걷는 폼이 엉성해지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여자친구를 반드시 오늘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마침내 대곡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19시 29분. 여기서 갑자기 심각해졌다. 합정에서 파주까지 가야 할 전체의 길 중에 반도 안 왔는데 벌써 오후에 걷기 시작한 시간에서 4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그런데 다리는 '지금 파주지? 그만 좀 걸어'라고 신호를 보내는 상태였다. 허리 통증도 있었다. 물집이 안 잡힌 발바닥 부분으로 이쪽저쪽 다양하게 걸으니 관절에 무리가 갔는지 오른쪽 발등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때부터 불안했다. '내가 여자 친구보다 늦게 도착하겠구나.'라고 말이다.

다시 파주를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곡산역을 중간 목표로 걸었는데 인도가 없는 암흑의 차로가 나왔다. 플래시를 안 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까만 길을 걷고 있는데 차들이 내 뒤에서 달려왔다. 이러다가 사고가 나겠다 싶어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어기적어기적 걸으면서 핸드폰 플래시를 들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차들이 나를 보고 옆으로 비켜 달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입에서 자연스레 욕이 나왔다. 나 자신도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힘들면 본성이 나온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너무 힘들어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역 이름을 외치면서 걸었다. "곡산! 곡산! 곡산! 으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곡역에서 곡산역 가는 길. 가로등이 없는 암흑의 차로가 나왔다. 차에 치일까봐 무서웠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한 시간 만에 곡산역에 도착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바로 쉬지 않고 백마역으로 걸어갔다. 플래시와 카카오 맵 위치 정보를 켜놔서인지 핸드폰 배터리가 금세 닳아 꺼져버렸다. 핸드폰도 충전하고 체력도 충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마역으로 들어갔다. 20시 49분. 편의점에서 빵과 초콜릿 우유를 사고 고객 편의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충전했다. 쉬고 있는데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했다는 내용이었다. 22시 30분에 파주 금릉역에 도착 예정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지칠 줄 몰랐어."

여자 친구는 내가 다칠까 봐 걱정돼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지하철을 타라고 권유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여자 친구 집까지 멋지게 걸어가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나약해지려고 한다. 이번 도전에 실패하면 나중에 다른 일도 힘들어서 다 포기할 것 같아. 파주까지 걸어가게 해주면 안 돼? 밤늦게 도착할 텐데 얼굴만 보고 갈게." 여자 친구는 나의 다짐이 갸륵해서인지 알았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내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여자 친구가 퇴근하고 와서 삼겹살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밥도 안 먹고 퇴근해서 바로 오는 길이었다. 정말 미안했다.

백마역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경의중앙선 다음 역인 풍산역을 향해서 걸었다. 백마역에서 풍산역까지의 거리는 2km다. 그 2km를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지하철로는 2분인 거리인데 말이다. 몸을 비비 꼬면서 걸으면서 "풍산! 풍산!" 을 외치면서 걸었다.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리고 발만 보고 걸었다. 누군가 나를 봤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거나 걸음걸이를 최대한 정상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뭔가 이 상황이 웃기고도 슬펐다. 특별한 경험을 하는 설렘으로 출발했는데 이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왜 한다고 했지···?'

고통스러움에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힘들지만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이 고통을 추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22시 56분. 일산의 황룡산 초입까지 오게 되었다. 파주 금릉역까지는 6.8km가 남았다.




일산 황룡산 초입에 진입했다. 금릉역까지 1시간 43분 거리

황룡산 초입에서 금릉역을 향하는 길은 완전 시골 논길이었다. 왼쪽에는 비닐하우스가 있었으며 옆에는 도랑이 있었다. 빛도 없고 인적이 드물어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마치 전쟁에서 다친 사람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는 것처럼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걸어갔다. 그러다가 오른쪽 도랑에 큰 물체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서 매우 놀라 넘어질 뻔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은 왼쪽으로 틀고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서 물을 바라봤는데 다이빙 선수가 물에 빠졌을 때 보이는 것 같은 용솟음을 목격했다. '수달인가? 고라니가 물에 빠진 건가?'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빠르게 절뚝이며 걸었다. 워킹데드에 나오는 좀비같이 말이다. 하지만 한동안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왼쪽에는 비닐하우스였고 오른쪽에는 도랑이 흘렀다.




칠흙같은 암흑의 시골 논길. 왼쪽에는 비닐하우스, 오른쪽에는 도랑이 있었다.

도랑 길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차로를 걷게 됐다. 너무 어둡고 달리는 차들이 간혹 있어 플래시로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배터리가 빠르게 소모돼 핸드폰이 꺼지려고 했다. 내 다리도 닳고 있는 기분이어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찰나 바로 눈앞에 금릉역이 보였다. 00시 51분 드디어 파주 금릉역에 도착한 것이다. 15시 21분에 합정에서 출발했으니 9시간 30분 만이다. 여자친구는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려줬다. 여자친구는 나를 김밥천국으로 인도해줬다. 절뚝거리는 나를 웃으면서 부축해줬다.




새벽 6시 22분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걸어서 도착한 금릉역. 약 19시간 만에 도착했다

김밥천국에서 치즈 라면과 소고기 김밥, 돈가스, 칼국수를 흡입했다. 점심 말고는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무척이나 허기진 상태였다. 먹기 전에 손을 씻으려고 주방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가라고 키를 주신 것이 떠오른다.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화장실을 가는 내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하면서도 재밌어하는 여자 친구의 표정을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밥을 먹으며 예전에 여자 친구를 서운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쉬는 날 파주에 있었던 여자 친구가, 퇴근 후 하남에 온 나에게 파주에 오라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그 당시 너무 피곤해서 여자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퇴근해서 방금 하남에 도착했어! 여기서 파주까지 왔다 갔다 하면 4시간이나 걸리는데 지금 오라고?! 미리 약속을 잡으면 안되니?"

그랬던 내가 4월 1일 새벽 6시 22분부터 4월 2일 새벽 1시까지 약 19시간이 걸려서 여자 친구를 만나고 왔다. 여자 친구는 자기를 보러 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줬다. 나는 "널 보러 오는 길이 왜 이렇게 힘드냐?"라고 물었다. 서로 추억할 것이 생겼다. 참 기뻤다. 나와 여자친구의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하남사는 필자와 파주사는 필자의 여자친구. 추억하기 위해 김밥천국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번 주 토요일, 누군가를 향해서 걸어보시면 어떨까요?

나만의 경험이 없으신 분들, 연인 또는 가족,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하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필자의 브런치 원문 보기 ▶ https://brunch.co.kr/@woobinnada/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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